2001년 9월은 디자인이라는 게 무력하고 하찮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디자인이라는 나의 일은 가치 있는 주장을 뒷받침하거나 좋은 것을 촉진시키고 시각적인 공해를 막는 것과는 애초부터 관계가 없다. 우리 디자이너들에게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책임이라는 것이 존재할 텐데. 만약 지난 8월이었다면,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하루를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적었을 것이다.

1. 행복을 위해 노력하라
2.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
3. 도와라, 남들도 도울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우선 순위를 이렇게 바꿀 생각이다.

1. 타인에게 도움을 베풀라
2.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
3. 행복을 위해 노력하라

그간 내가 운영하는 디자인 스튜디오는 모든 디자이너들이 원할 법한 멋진 작업을 해왔다. 이를테면 데이비드 번 David Byrne의 책 표지 디자인 같은 일이다.


david byrne: Your Action World


그 같은 디자인 작업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그 결과 해당 제품의 판매에도 좋은 영향을 미쳤기에, 나는 그들 제품을 구입한 어느 누구에게라도 우리가 피해를 주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던 중 나는 1년간 외부의 일을 전혀 하지 않는 개점 휴업 상태에서 나 개인의 실험적인 작업만을 위한 시간을 가졌다. 그 1년 동안 많은 것을 배웠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내 스튜디오에서 맡는 작업의 일정 부분을 ‘멋진’ 일에서 ‘의미 있는’ 일로 전환시키고 싶다는 것이었다.

80년대의 그래픽 디자인은 레이아웃에 대한 질문들과 라이프 스타일 잡지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네빌 브로디 Neville Brody가 아트디렉터로 활동한 잡지 The Face 가 큰 반향을 일으킨 게 80년대였다. 그리고 90년대의 디자인을 지배한 것은 타이포그래피와 가독성, 레이어링(layering)에 대한 문제들이었으며, 이 시기를 주도하며 각광을 받은 디자이너는 데이비드 카슨 David Carson이었다.

최근 불필요한 것에 의해 촉발되는 위기를 얘기한 바 있으며 동시대의 문화가 월간지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에 대해 비탄을 표한 피터 사빌 Peter Saville 같은 뛰어난 디자이너에서 보듯, 이제는 마침내 내용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시대가 된 듯하다. ‘중요한 일부터 먼저(First Things First)’라는 디자인 선언문이 나의 직업에 미친 막대한 영향 역시 분명 그러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빅터 파파넥 Victor Papanek의 저서 세상을 위한 디자인 Design for the Real World 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세상에 산업디자인보다 더 유해한 직업이 있긴 하겠지만,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산업디자인보다 더 거짓된 유일한 직업이 있다면 그것은 광고디자인이다.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남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구입하라고 부추기는 행위는 현존하는 분야 중 가장 거짓된 일이라 할 수 있다.”

나쁜 디자인이 우리의 삶에 해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난 알고 있다. (2000년 대선에서) 사소한 잘못된 인쇄가 플로리다에서 일으킨 문제부터, 불필요한 정크 메일이나 과대 포장에 이르기까지, 나쁜 디자인은 이 세상을 더욱 더 살기 어려운 곳으로 만든다.


Florida Ballot


그리고 나쁜 주장이나 나쁜 제품과 결합된 강력한 디자인은 인간에게 한층 더 나쁜 해악을 끼칠 수 있다.

좋은 디자인(Good design) + 나쁜 주장(bad cause) = 나쁨(bad)





러시아 디자이너 안드레이 로그빈 Andrey Logvin이 트로이카라 한 단순한 포스터가 이를 잘 보여준다.

칩 키드 Chip Kidd의 신작 소설 치즈 원숭이 The Cheese Monkeys 에 디자인 교사로 등장하는 가상 인물 윈터 소르벡 Winter Sorbeck의 대사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미국을 상징하는 엉클 샘이 상업 미술이라면, 성조기는 그래픽 디자인이다. 상업 미술은 상품을 구입하게 만들지만, 그래픽 디자인은 생각을 전해준다.”

나 역시 그럴 수 있다면, 사람들에게 생각을 전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아침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좋은 이유가 될 것 같다.

2002년 3월 23일,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그래픽아트협회(AIGA; American Institute of Graphic Arts)의 전국 컨퍼런스에 발표된 글. 잡지 <I.D.> 2002년 4/5월호에 재수록됨.